이번 조사 결과는 그 동안 단편적으로 이해되어 온 한국사회의 정의에 대한 생각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고 한국사회의 정의에 대한 인지지도를 그려보는 중요한 밑그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조사를 통해 확인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분배정의와 관련하여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산술적 평등 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로 다수라는 점에서 시민들의 분배정의에 대한 생각은 절대적인 의미의 평등주의적 정의관보다는 자유주의적 평등정의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분배와 보상의 기준으로서 전통적으로 좌파는 필요(needs)에 따른 평등 분배를 선호하고, 우파가 성과(performance) 혹은 능력(merit)에 비례한 차등분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반해, 한국에서는 “근무태도”와 같은 “노력에 비례한 보상”을 선호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보상의 자격이나 결과상의 업적을 따지기보다 과정상의 노력을 중시하는 셈이다. 둘째, 차등분배에 대한 선호는 경쟁의 효율적 배분 기능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경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공존한다. 경쟁의 장점만을 긍정하기보다는 긍정적/ 부정적인 양면을 함께 보고 있는 셈이다. 셋째, 공익과 자유의 관계에서 경제적으로는 공익을 명분으로 한 소유권에 대한 제한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반면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자유보다 질서를 우선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정의에 대한 태도는 한국에서 왜 복지정책 수요가 크지만 동시에 보편복지나 기본소득제 같은 정책보다 선별복지나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는 ‘근로 장려 세제(EITC)’에 대한 선호가 큰 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나아가 기업이나 조직에서 야근 문화가 쉽게 사라지기 힘든지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 공정성의 관점에서 본 한국사회의 실태를 시민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본 결과 경쟁의 불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 공정한 차등 분배는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균등을 전제로 공정한 경쟁 속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입시나 취업의 기회가 균등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자산 분배가 불공평하다는 불신이 크다. 무엇보다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성취와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배경이나 연줄에 의해 좌우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에 의한 계층상승의 기회는 닫혀 가고 있다는 사회적 비관이 심화되고 응답자의 3분의 1은 자신이 본인을 평균적인 삶에 비해 실패했다고 보는 열패감을 피력하고 있다. 반대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공한 사람은 스스로의 성공을 자수성가로 보지만, 열패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눈에 성공한 사람은 배경과 연줄로 이룬 행운아에 불과한 셈이다. 사회에 만연한 이중 잣대는 신뢰자본을 위축시키고 심리적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환경으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정책 및 제도적 대안과 관련하여 우선 개인의 노력보다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결과가 좌우되는 경쟁 제도를 개혁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사법고시를 부활시키라는 요구가 72%, 특목고는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54%였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배경과 능력이 작동하는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는 반대여론이 다수였다. 이익의 배분에서는 차등분배를 선호하지만 병역의무와 같은 책임의 영역에서는 일률적인 형평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체복무제에 반대가 강하고, 병역복무자에 대한 군가산점제에 대해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향후 모병제 도입에 찬성이 56%가 찬성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 하에 놓인 특정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조건의 평등”을 위한 각종 우대제(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다수다. 특히 저소득층, 고연령층, 비 수도권 거주자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경쟁의 당사자 집단(2030세대)이나 취약계층으로 분류되지 않는 집단(주로 서울 거주자)에서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강하다. 또한 본인이 인사권자라고 가정하면 이를 적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나타나 우대제 실시 과정에서 적지 않은 딜레마가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불공정을 완화하기 위한 분배정책에 대한 요구도 높았다. 고소득층 증세에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성장보다 분배정책을 우선하라는 여론도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개인의 자구노력이나 생산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일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보편복지에 대한 견제 심리도 확인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경쟁을 통한 공정한 차등, 노력에 따른 분배를 중시하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로 추측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복지 포퓰리즘이 작동하지 않는 중요한 요인임을 시사한다.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의 문제는 2000년 대 이후 사회적 쟁점으로 자리 잡았지만, 정작 이 문제에 대한 실증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본 조사 결과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의관에 대한 중요하고도 새로운 발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에는 연구와 분석, 자료의 한계가 명백하다. 본 조사가 정의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는 촉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담당자: 정한울 여론분석 전문위원
전화: 02-3014-1057
e-mail: hw.jeong@hrc.co.kr

조사개요

  • 모집단: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 표집틀: 한국리서치 마스터샘플(2017년 12월 기준 약 40만명)
  • 표집방법: 지역별, 성별, 연령별, 학력별, 직업별 비례할당추출
  • 표본크기: 1,000명
  • 표본오차: 무작위추출을 전제할 경우, 95%신뢰수준에서 최대허용 표집오차는 ±3.1%p
  • 조사방법: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 가중치 부여방식: 2017년 9월 행정안전부 발표 주민등록인구 기준 지역별, 성별, 연령별 가중치 부여(림가중)
  • 응답률: 메일 발송 7,673명, 메일오픈 1,713명, 조사완료 1,000명 (발송대비 13.0%, 오픈대비 58.4%, 참여대비 71.2%)
  • 조사일시: 2018년 2월 23일 ~ 2월 28일
  • 조사기관: ㈜한국리서치(대표이사 노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