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Justice)”는 동서양에서 모두 오랜 시간 동안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정의의 문제는 집단의 의사결정과 재화 분배의 정당성과 규범으로 작동하게 되며, 제도 신뢰의 축적과 사회 통합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 정의롭지 못한 정치적 의사결정과 불공정한 제도 운영은 사회갈등과 시민 저항을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쟁 이후 산업화, 민주화라는 거시적 국가 과제가 어느 정도 공고화된 2000년 대 이후, 정의의 문제는 국가적, 사회적 의제로 부상해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정작 시민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이고, 어떤 기준으로 공정을 판단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 결과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정의롭고 공정한 한국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이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한국리서치 2월 조사의 기획 주제를 공정성으로 잡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 보고서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공정성에 대한 한국리서치 조사결과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 조사를 통해 확인된 주요 발견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노력에 비례한 차등 분배 선호, 한국의 근태 중시/야근 문화의 뿌리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 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였다. 차등분배를 선호하는 응답은 전 계층 및 사회집단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능력이나 성과 보다 근무태도와 같은 노력 요인에 대한 보상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다음 각 기준에 대해 보수의 차이를 얼마나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차이를 크게 두어야 한다”는 응답기준으로 정리한 결과, 근무태도(43%) > 능력(23%) > 업무 성과(22%) > 근속연수(16%)순으로 나타났다. 학력이나 가정형편, 부양가족 수는 임금격차를 둘 요인이 아니라는 응답이 69%로 높았다. “학력”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신뢰하지 않으며, “필요(need)에 의한 분배”는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등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경쟁의 효율성 제고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 동시에 경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공존한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 무려 79%가 동의하고 있다. 동시에“한국에서 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여론이 62%나 되었다. “경쟁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는 의견은 45%로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20대에서는 58%로 높게 나타나 경쟁의 부담감이 특정세대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력에 비례한 차등분배를 선호하고 경쟁의 폐해 못지 않게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는 태도는 한국에서 보편복지나 기본소득제 같은 정책보다는 선별복지나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는 ‘근로 장려 세제(EITC)’에 대한 선호가 더 큰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개인의 자구노력과 생산성과 연계되지 않은 복지 정책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동한다. 나아가 기업이나 조직에서 소위 “근태”가 인사평가의 주요 기준이 되고, “야근 문화”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국사회의 불공정 실태

법 앞의 평등, 기회 균등, 계층상승 불신, 성공에 대한 이중잣대 팽배

공정한 차등 분배는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균등을 전제로 공정한 경쟁 속에서 가능하다. 공정성의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실태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우선 경쟁의 기회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불신이 확인된다. 룰이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으며, 입시나 취업의 기회가 소위 “가진 자”에 집중되고, 그 결과 소득 및 자산 분배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이 개인의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배경이나 연줄에 의해 좌우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법 집행이 불공정하다는 응답이 74%, 소득분배나 취업기회의 불공정성을 지적하는 의견은 71%였다. 승진/진급 기회에 대해서도 65%로 높게 나타났다. 한국사회에서 계층상승의 기회는 닫혀 있다는 의견이 73%였고, 응답자의 3분의 1은 본인이 본인 세대의 평균적인 삶에 비해 실패했다는 열패감을 피력하고 있다.

불공정 인식과 강한 열패감 이면에는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고 있다. 스스로 성공했다는 응답자는 자수성가의 결과로 이해하지만, 스스로 실패했다고 답한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성공은 배경과 연줄의 힘에 의한 불공정한 승리로 보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이중 잣대는 신뢰자본을 위축시키고 심리적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환경으로 작용한다.

불공정 해소를 위한 솔루션

경쟁 제도와 징병제 개혁, 보편복지 견제심리, 우대제는 딜레마

우선, 개인의 노력보다는 부모의 배경과 연줄과 같은 외적인 요인이 작동하는 불공정한 경쟁 제도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사법고시를 부활시키라는 요구가 72%, 특목고는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과반을 넘었다. 부모의 재력을 보상하는 기여입학제에 대해서도 반대여론이 다수였다.

모든 국민이 병역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 헌법의 정신이지만, 실제 군복무는 배경 없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공무원 채용 시 군가산점제에 대해서는 72%가 찬성하여 군복무에 따른 희생에 대해 보상하라는 여론이 다수다. 복무 형식의 다양화를 인정하는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하는 여론은 41%에 불과했다. 근원적으로 향후 모병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데는 56%가 찬성했다

불공정 경쟁은 양극화의 심화로 귀결된다.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분배정책에 대한 요구가 높다. 성장보다 분배정책을 우선하라는 여론과 함께 고소득층 증세에 압도적인 지지도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개인의 자구노력이나 능력에 대한 고려 없이 일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보편복지에 대한 견제 심리도 확인된다.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에 대한 우대제(affirmative action)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호적인 태도가 다수를 점했다. 주로 저소득층, 고연령층, 비 수도권 거주자 집단에서 지지가 많았다. 그러나 경쟁의 한복판에 있는 직접적인 당사자(2030세대)나 취약계층으로 분류되지 않는 집단(주로 서울 거주자)에서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강하다. 표면적으로 우대제에 대한 지지는 높지만, 막상 본인의 문제로 인식할 때에는 우대제 실시에 주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상의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의 정의에 대한 여론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이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보고서가 한국사회의 정의에 대한 인지지도를 만들어가는 작은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담당자: 정한울 여론분석 전문위원
전화: 02-3014-1057
e-mail: hw.jeong@hrc.co.kr

조사개요

  • 모집단: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 표집틀: 한국리서치 마스터샘플(2017년 12월 기준 약 40만명)
  • 표집방법: 지역별, 성별, 연령별, 학력별, 직업별 비례할당추출
  • 표본크기: 1,000명
  • 표본오차: 무작위추출을 전제할 경우, 95%신뢰수준에서 최대허용 표집오차는 ±3.1%p
  • 조사방법: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 가중치 부여방식: 2017년 9월 행정안전부 발표 주민등록인구 기준 지역별, 성별, 연령별 가중치 부여(림가중)
  • 응답률: 메일 발송 7,673명, 메일오픈 1,713명, 조사완료 1,000명 (발송대비 13.0%, 오픈대비 58.4%, 참여대비 71.2%)
  • 조사일시: 2018년 2월 23일 ~ 2월 28일
  • 조사기관: ㈜한국리서치(대표이사 노익상)